39년 동안 모아둔 것을 정리하며 나를 돌아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
살다 보면 버리지 못하고 켜켜이 쌓아온 것들이 있습니다.
39년 만에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위한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쓰려고 했을까?
나의 삶에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마치 머리 위에 무거운 무엇인가를 올려둔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렇게 네 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같은 상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수많은 일상과 힘들었던 기억들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를 꺼내려면 그 위에 쌓인 시간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9년 동안 모아두었던 것들
39년 만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정말 많은 통장을 있었습니다.
분명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던 이유가 있었겠지요.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기도 했지만, 어떤 것들은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은행 통장들.
월급명세서.
아이들이 보낸 편지.
어버이날 달아주던 종이 카네이션.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받았던 산모수첩까지.
그것들은 모두 나의 작은 보물상자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왜 통장들과, 월급명세서를 버리지 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종이 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우리 가족이 살아온 시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 종이에는 돈이 적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편이 우리 가족을 위해 살아온 수고의 시간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떠난 뒤를 생각하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였습니다.
코로나의 끝 무렵 가족들에게서 나에게 병이 옮겨왔고, 혼자 아픈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어느 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갈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남기게 된다면 결국 누군가는 그것들을 정리해야 하는구나.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가 어느 날 떠나더라도 아이들에게 물건까지 남겨주지는 말자.
최소한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 번째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통장 속의 기억
재산은 없는데 통장의 개수는 참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집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었던 대출 통장이었습니다.
그 시절 월급은 정말 적었습니다.
오천 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던 때도 있었습니다.
콩나물도 삼백 원어치만 살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가장 먼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주머니, 얼마부터 팔아요?"
가격을 들으면 그 금액만큼만 달라고 했고,
혹시 조금만 더 적게도 살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습니다.
참 우스운 것은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 그렇게 묻게 됩니다.
하지만 이유는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돈이 부족해서였고,
지금은 많이 사도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손주가 자주 와서 식구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한 삶
본인들은 섭섭할 수도 있지만,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다시 찾고 싶었습니다.
엄마로서의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그런 살아 있는 느낌을 말입니다.
친정엄마를 보내고 난 뒤
통장을 정리하던 무렵, 내 마음속 갈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었을 때 아이들에게 이런 것만큼은 남겨두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친정엄마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러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자식도, 며느리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물건을 버리는 마음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더 커졌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가지도 못한 사람이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기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글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정리는 살아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이후로는 옷도 잘 사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물건은 줄이고 싶은데,
글은 더 많이 남기고 싶습니다.
아마도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과 마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9년 동안 모아두었던 통장과 월급명세서를 정리하며,
나는 물건보다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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